軍과 약물

유사 이래 인류가 전쟁을 시작한 이후 군대와 알코올과 약물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형성해왔습니다. 이미 수 천년전부터 군대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술의 힘을 비는 일은 일상화된 일이었습니다. 고대 앗시리아와 이집트의 전사들은 전투 시 아편 성분의 약을 마셨으며 잉카족 전사들은 1천km가 넘는 장거리를 코카(coca) 잎을 씹으며 피로와 졸음을 없애가며 계속 행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2차 대전중 일본의 필로폰 보급과 연합국 조종사들의 각성제 복용 사례, 그리고 최근의 예로는 2002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캐나다군을 오폭하여 사망케한 미 공군 조종사들의 각성제(Dexedrine) 논란에서 보듯 아직도 군에서는 임무 수행이라는 명분을 걸고 약물을 복용하게하는 관행이 지속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독일의 경우는?

대전 발발 당시 세계 유수의 화학, 제약 기업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독일의 경우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최근 獨 슈피겔 지가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약물남용 실상을 보도했던 기사를 찾아 서툴게나마 번역해봤습니다. 기사를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역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이 분야에서도 독일인 특유의 왕성한 실험정신과 치밀한 조직력이 발휘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낯설게 느껴지는 단어들은 따로 밑에 설명을 달아놨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히틀러의 "藥에 취한 병사들"

안드레아 울리히(Andreas Ulrich)
Der Spiegel. May 6, 2005

나찌 정권은 국민 건강을 증진시킨다는 명목으로 금욕을 설파했다. 그러나, 전격전을 치뤄야할 때가 되자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병사들에게 약물과 알콜을 펌프질하듯 퍼주었다. 스피드(역주: 메스 암페타민계의*1 각성제를 지칭)는 자의로 선택해서 복용할 수 있었지만 결국 많은 이들이 모르핀과 알콜에 중독되어갔다.

각성제인 퍼비틴은 최전선에 있는 병사들에게 배급되었다.

점령지 폴란드에 주둔하고 있었던 한 젊은 병사는 쾰른에 있는 집의 부모님들과 형제들에게 보낸 1939년 11월 9일 날짜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여기 일은 만만치 않습니다. 편지 한 통을 써보내려면 2~4일이 걸리는 것을 곧 이해해주실거에요. 오늘은 제게 얼마간의 퍼비틴을 보내주시라고 편지를 쓰고 있는 중이랍니다...; 사랑해요, 하인(역주: 하인리히의 애칭)"

오늘날 스피드(speed)란 이름으로 잘 알려져있는 각성제인 퍼비틴은  독일 국방군(Wehrmacht)이 가진 경이로운 약이었다.

1940년 5월 20일, 22살의 젊은 병사는 식구들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여분으로 보관할 수 있게 더 많은 퍼비틴을 얻어다 주실 수 없으세요?" 그리고 1940년 7월 19일 브롬베르그(Bromberg)에서 써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쓴다. "가능하시다면, 제발 좀 더 많은 퍼비틴을 보내주세요" 이 편지를 쓴 젊은이는 훗날 국제적으로 저명한 작가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하인리히 뵐(Heinrich Boell)이다. 1972년, 그는 전후 독일에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인리히 뵐, 1941년 사병으로 복무중일 때의 사진.
쾰른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나 나찌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으나
징집 후 유럽에서 러시아까지 여러 전선을 끌려다니면서 수 차례 부상을 입었다.
'폐허문학'으로 지칭되는 전후 독일 문학의 대표적인 문인이 되었으며
토마스 만 이후 43년만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빼어난 인격과 가식없는 소탈함으로 생전에 많은 존경을 받았던 작가.

많은 독일 국방군 병사들이 전장에 나갔을 때 열심히 퍼비틴을 복용했다. 특히 대 폴란드전과 프랑스전같이 속도를 재촉하는 전격전(Blitzkrieg)에서 더욱 의존도가 높았다. 독일군은 1940년 1분기에만 수 백만정의 메타 암페타민 알약을 보급받았다. 이들 약의 보급은 조종사와 수병들, 그리고 보병들이 초인적인 성과를 올릴 수 있는 것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군 지휘부는 술에 취하고 중독이 되어가는 군병력들이 연합군에 대해 승리를 쟁취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동안만큼은 흥분제만이 아니라 알코올과 아편제까지 문자 그대로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는 판국이었다. 하지만 나찌 수뇌부는 약물 중독과 도덕성 타락 같은 부작용들을 주의깊게 관찰하는 일에는 그다지 열심이진 않았다.

1938년에 처음 시장에 소개된 이후 베를린 소재 템믈러(Temmler) 제약회사가 새로이 개발한 이 메스암페타민계의 퍼비틴은 빠른 속도로 독일 민간사회에서 가장 잘 팔리는 약품의 위치를 차지했다. 주간 임상저널(Klinische Wochenschrift)에 기고된 리포트에 따르면, 경이로운 신약으로 소문난 퍼비틴은 군의관이자 베를린 군의학교의 일반생리학 연구소장을 맡고 있던 오토 랑케(Otto Ranke)의 주의를 끌었다.

암페타민의 약효는 신경계를 흥분시켜 경계상태를 촉발시킨다는 점에서 인체에 의해 생성된 아드레날린(adrenaline)과 비슷하다. 투약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자신감과 집중력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려는 의지력을 제고시킨다. 이와 동시에 수면욕구뿐만이 아닌 고통에 대한 민감도와 식욕과 갈증을 둔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1939년 9월 랑케는 90명의 대학생을 상대로 이 약에 대한 임상 테스트를 실시했으며 독일 국방군이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퍼비틴이 도움을 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초창기에 퍼비틴은 폴란드 침공전에 참전한 운전병들에게 테스트 차원에서 투여되었다. 범죄학자인 볼프 켐퍼(Wolf Kemper)에 따르면 이후 이 약은 파렴치하게도 최전선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병력에게까지 배급되기에 이르렀다.

3천5백만정의 알약

1940년 4월과 7월 동안이라는 짧은 기간만에도 무려 약 3천 5백만정의 퍼비틴과 이소판(Isophan, 크놀(Knoll)제약회사가 기존의 약을 약간 수정해 내놓은 개선판) 알약들이 독일 육군과 공군으로 발송되었다.  각기 3그램의 활성성분을 함유하고 있는 알약 일부는 OBM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리며 독일 국방군 의료부에 보내진 후 바로 군병력에 배포되었다. 만일 배송이 긴급하게 필요할 때는 전화로도 속달주문을 할 수 있었다. 알약 패키지는 "각성제"로 표기되었고 "각성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할 때만 1~2정씩 투약할 것"이라는 복용 권고문이 라벨로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군의관들은 약물 복용 후 신체의 회복기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으며, 상습 투약자에게는 약효가 점차 감소하고 있는 사실에 우려하고 있었다. (역주: 중독증상을 의미합니다.)  몇몇 제한적인 사례들에서 투약자들은 과도한 발한증(역주: 땀 분비)와 혈액순환장애를 겪었고  심지어 사망 사고마저 발생했다. 금욕주의에 대한 히틀러의 신조를 지지했으며 제3제국 보건부 장관이었던 레오나르도 콘티(Leonardo Conti)는 알약의 복용에 규제를 가하려고 했으나 최소한 독일 국방군에 대해서는 그저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따름이었다. 1941년 7월 아편규제법에 따라 퍼비틴은 규제약물로 분류되었지만 같은 해에 여전히 약 1천만정의 알약들이 독일군에 배급되었다.

일반적으로 퍼비틴은 병사들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경우 투약하는 검증된 약물로 간주되었다. 해군 의무장교들에게 회람된 메모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었다. "모든 의무장교들은 퍼비틴이 고도로 차별화된 강력한 각성제이며 언제든 자신의 한계 내에서 평균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게끔 병사를 적극적이고도 효과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어야만 한다."

"갑자기 병사들의 사기가 올랐다"

약물 투여의 결과는 유혹적이었다. 1942년 동부전선에 주둔해있던 약 500명에 달하는 독일군 병력들이 소련군에게 포위되어 탈출을 시도하고 있던 중이었다. 기온은 영하 30도. 부대에 배속된 군의관은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자정 전후. 곳곳에 허리까지 차오르는 눈을 뚫고 탈출을 시도한지 6시간이 지난 시점, 점점 더 많은 병력들이 탈진해서 눈속에서 드러눕기 시작했다." 해당 부대 지휘관은 병사들에게 퍼비틴을 투여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불과 반 시간도 안 되서" 군의관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병사들이 한결 기분이 나아진 것 같다는 내용의 보고를 동시에 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행군을 시작했으며 사기는 고양되었으며 훨씬 민첩해졌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독일은 점점 더 어린 병사들을 징집했다.
                  용기와 인내심을 발휘하기 위해 이들중 보다 많은 병사들이 약물과 알코올에 의존했다.

보고서가 군 의무사령부에 올라가기까지는 근 6개월이 걸렸다. 하지만 의무 사령부의 반응은 단지 새로운 지침문과 투약 지시문을 시달했을 따름이었다. 이중 약물복용에 대한 위험성을 알리는 문구는 이전과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1942년 6월 18일에 시달된 "피로의 진단과 제거에 대한 지침문"은 이전과 동일했다. "3~8시간 동안 수면 욕구를 떨쳐버리기 위해서 1회 2알 복용할 것. 2알씩 2회 분량의 투약은 통상 24시간 동안 약효가 지속됨"

전쟁이 종반으로 치닫는 가운데에서도 나찌는 여전히 기적의 알약을 병사들에게 써먹고 있었다. 1944년 3월 16일, 독일 북부의 키엘(Kiel) 군항에서 훗날 서독 기민당 소속의 의원이자 국방위원회장을 맡게되는 해군 중장 헬무트 헤예(Hellmuth Heye) 제독은 평균 시간 이상 전투를 지속하도록 명령받은 병사들이 임전태세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으며 동시에 자부심과 기력을 돋울 수 있는 약물을 요청했다.

헬무트 헤예 제독
1941년 노르웨이 해전에서 중순양함 아드머럴 히퍼(Admiral Hipper)의 함장으로
英 글로우웜(HMS Glowworm)호를 격침시킨 인물.
종전 후 콘라드 아데나워의 기민당에 합류, 의회에 진출했다.
적 함장의 용맹과 무공을 칭송하는 메시지를 적십자사를 통해 영국으로 보냈고
전사한 글로우웜호의 함장은 적장의 강력한 추천에 따라
2차 대전 최초의 빅토리아 십자훈장 수훈자가 됬다는 일화가 있다.

얼마 후, 키엘 대학의 약학교수인 게르하르트 오제초프스키(Gerhard Orzechowski)가 헤예 제독에게 암호명 D-IX*2)라고 불리는 알약을 선보였다. 그것은 코카인 5밀리그램, 퍼비틴 3밀리그램, 유코달(Eukodal: 모르핀성분의 진통제) 5밀리그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늘날 이런 성분의 약을 조제하다 적발된 약사는 십중팔구 감옥에 투옥될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해당 알약은 '바다표범'과 '비버'라고 불리는 독일 해군의 초소형 잠수함에 승선하는 승무원들에게 시험 투약되었다.

장려된 음주

일반인들의 마약이라고 할 수 있는 알코올 또한 독일 국방군에서 인기가 있었다. 군 의료단의 발터 키텔(Walter Kittel) 장군은 다음과 같이 썼다."술은 전투의 공포과 대면한 후 긴장을 풀어주며 삶을 즐기는 것을 돕는다. 술을 병사에게 주길 거부하고 전우들과 음주를 즐겼다는 이유로 처벌을 하는 자는 오로지 광적인 인간일뿐이다" 장교들은 보상으로 부하장병들에게 술을 배급했으며 슈냅스(역주: Schnapps, 독일산 소주라고 불릴 수 있는 값싸고 독한 화주)는 병사들의 수당을 다시 회수하는 반가운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군의 방침에 따라 영내 매점에서 일상적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프라이부르그(Freiburg) 출신의 역사가이자 독일국방군 내 약물남용에 대한 전문가인 페터 슈타인캄프(Peter Steinkamp)는 말한다. "군 수뇌부는 공공연한 만취가 아닌한 병사들의 음주를 못 본체 했습니다."

하지만 1940년 7월 프랑스를 패배시킨 후, 히틀러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본인은 음주로 인해 범죄행위에 가담하는 유혹에 넘어간 독일 국방군 장병들을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 죄상이 심각한 범죄자는 치욕적인 죽음을 선고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술이 가져다 주는 유혹은 총통의 협박보다도 힘이 강했다. 불과 1년 후 군 총사령관인 발터 폰 브라우히치(Walther von Brauchitsch) 대장은 군 장병들이 "가장 심각한 도덕과 규율위반"을 저지르고 있으며 범인은 "알코올 남용"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알코올 남용의 부정적인 영향으로 영내 싸움, 사고, 하급자 학대, 상관 폭행 그리고 "부자연스러운 성범죄(역주: 음주 후의 호모 섹스를 언급한 것 같습니다.)"을 열거했다. 장군은 알코올이 군대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믿었다.

발터 폰 브라우히치 대장, 육군 최고사령관 (1938-1941)
동부전선의 전세가 악화되자 건강상의 이유로 경질됨.
히틀러를 반대하는 군 장교단에 공감했으나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던 우유부단한 인물. 전후 전범혐의로 체포되었으나 기소 전 사망했다.

군 의료단이 수집한 내부 통계에 따르면 1938년 9월에서부터 1944년 4월까지 705건의 영내 사망사고가 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통사고, 총기 사고, 자살과 같이 흔히 알콜 남용으로 야기되는 사고들이 빈번하다는 점에서 비공식적인 집계수치는 이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의무장교들은 알콜 중독자와 약물 중독자들을 치료 시설로 수용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군 의료기관에 의해 하달된 명령에 따르면 이 해결안은 "막연하게 확대될 수 있는 이점"을 갖고 있었다. 일단 이들 치료시설에 감금되면 중독자는 "유전병 자손방지법*3)"의 법 규정에 따라 심사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수용자들은 강제 불임시술과 심지어 안락사까지 당할 수 있었다.

주류 밀매자 처형

병사들이 공업용 메틸 알콜을 음용한 후 눈이 멀거나 심지어 사망하는 사례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1939년부터 베를린 대학의 법의학 연구소는 시종일관 메틸 알코올을 부주의한 독극물 섭취로 인한 사망 사례들의 주요 원인으로 기재했다.

1942년 가을 노르웨이에서 36살의 장교가 총살된 것은 이에 대한 본보기를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문제의 장교는 5리터의 메틸 알코올을 98% 순도의 알콜이자 술을 주조하는데 쓸 수 있다고 주장하며 대전차 부대원들에게 팔아치웠다. 여러 명의 병사들이 탈이 났고 이중 두 명은 사망했다. "공적"으로 간주된 장교는 총살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1942년 10월 2일자에 하달된 일일명령에 따르면 해당 처벌사례는 각 부대와 예비 부대에 공표되었으며 반복해서 꾸준히 군 훈화자료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끔 도와줄 수 있는 것이라면 실체가 어찌되었든 정당화될 수 있다고 여겼다. 모르핀(Morphine) 중독은 그 위험성이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기간 동안 부상병들과 군 의료진들 사이에 광범하게 만연되어 있었다. 전쟁 초기에 비교해볼 때 1945년경에는 4배가 넘는 군의관들이 모르핀에 중독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1940년 5월 10일 대서양 방벽 근처의 조그마한 마을로 배속된 군의관인 프란츠 베르트하임(Franz Wertheim)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시간 떼우기를 위해 우리 군의관들은 자신들에 대해 실험을 했다. 우선 코냑이 담긴 물컵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모르핀 주사 2개를 놓는다. 한낮에는 코카인이 쓸만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저녁 무렵에는 간간이 히오스신(Hyoskin, Skopolamin) *4)을 투약했다. 베르트하임은 덧붙였다. "그 덕분에 우리가 항상 오감(五感)을 통제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약물로 자신을 실험하는 군의관들

군 상사로 있으면서 군 의무사령부의 정신과 자문의를 맡고 있던 오토 부트(Otto Wuth) 교수는 지난 1차 대전 이후에 발생했던 만성적인 모르핀 중독(Morphinism)의 폭증과 같은 사태의 재연을 막기위해 1941년 2월, "전투 모르핀 중독에 대한 제안서"를 작성했다. 부트 교수의 제안에 따라 통증치료의 결과로 약물에 중독된 모든 부상병들은 중앙에서 기록관리를 하며 각 "지역 의료위원회"에 보고되었다. 거기서 부상병들은 합법적으로 모르핀을 제공받거나 꾸준히 검사를 받고 약물재활센터로 보내졌다. "이런 방법으로" 부트 교수는 결론을 내렸다. "모르핀 중독자들은 기록되고 주도면밀한 관찰을 받게될 것이며 전체 중독자들이 범죄자가 되는 것을 차단하게될 것이다."

나찌 수뇌부는 전쟁의 결과로 약물 중독자가 된 이들에 대해서는 알코올 중독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편이었다. 이는 아마도 군이 중독자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고소를 당할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독일 국방군은 이들 중독자들이 군에서 처음으로 약물들을 경험했다는 사실에 대해 책임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譯註-

1. 암페타민계 마약

암페타민 성분을 기초로 하는 마약을 통칭하는 용어로 강력한 중추신경흥분제이다. 주요 암페타민류에는 암페타민, 덱스트로 암페타민, 메스암페타민 등이 있으며 이중 시중에서 불법 유통되는 암페타민류는 대부분 메스암페타민이다. 암페타민류는 1887년부터 각성제 또는 식욕억제제로 사용되었으며 아드레날린 및 노르아드레날린과 같은 호르몬을 평소보다 많이 분비시켜서 흥분효과를 일으킨다. 약효는 최고 24시간까지 지속되며 약효가 사라지면서 우울증을 수반한다.

암페타민류를 장기간 남용하면 육체적, 정신적 의존증이 생기는 경우가 많으며 환시, 환청 나아가 뇌손상 및 정신병과 같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의학용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는 추세이다. 암페타민을 주요성분으로 하는 대표적인 각성제로는 퍼비틴 (Pervitin)과 벤제드린(Benzedrine)을 들 수 있다

스피드는 메스암페타민의 일종으로 정맥으로 주사되어 약효가 금방 나타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메스암페타민은 60년대에 값싼 약물로 인기를 누렸으며 코카인이나 헤로인의 대체약물로 사용되었다

"히로뽕"은 1941년 일본 제약회사중의 하나인 大日本製藥이 메스암페타민을 "Philopon (히로뽕)"이라는 상품명으로 판매하면서. 이 상품명이 그대로 우리나라에 전해져 메스암페타민을 가르키는 용어로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처음으로 시판될 당시에는 졸음을 쫓고 피로감을 없애주는 단순 각성제로 인식되어 신문광고까지 되었으며, 전쟁중에는 군수용품으로 대량생산되어 군인 및 군수공장 등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제공, 피로회복 및 전투의욕, 작업능력, 생산능력 등을 제고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특히 차가루에 히로뽕을 혼합하여 만든 정제를 출격을 앞둔 젊은 가미가제특공대원에게 복용하도록 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없애도록 하였다. (출처: 국정원, 대검찰청 마약과)

2. D-IX

나찌가 전투원에게 '무제한의 전투력'을 부여하기 위해 대전 말기에 개발한 코카인을 주성분으로 한 마약.

1944년 11월 베를린 북부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강제 수용소의 수인들을 상대로 투약실험을 했다. 그 결과 수인들은 중량 20kg의 배낭을 메고 단 한 번의 휴식도 없이 90km를 주파할 수 있었다. 실험에 참가한 수인의 회고에 따르면 "처음에는 휘파람을 불고 노래를 했으나 약효가 사라진 24시간 후에는 대부분 탈진해서 쓰러지고 말았다." 실험 결과에 고무된 나찌는 전군에 보급하기 위해 서둘러 대량생산체제를 준비하다 종전을 맞이했다.

나찌는 1920년대에 유럽 사교계에서 퍼지기 시작했던 코카인을 "악마의 약"이라고 혐오했으나 자신의 병사들을 "전투기계"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를 서슴없이 사용하고자 했다. D-IX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인물중 한 명은 유명한 SS의 오토 스코르체니(Otto Skorzeny) 중령이였다고 한다.

3. 유전병 자손방지법 (Gesetz zur Verhutung erbkranken Nachwuchses)

나찌가 1933년 정권 출범 후 제정한 법률, 이에 따라 30만명의 정신병 환자와 알코올 중독자, 장애인들이 강제 거세를 당하고 1939년부터는 비밀 명령에 따라 약 8만명의 장애인들과 불구아동들이 "가치없는 삶"으로 규정되어 안락사를 당했다. 이 법률의 시행은 결국 대학살의 모델이 됨.

4. 히오스신(Hyoskin, Skopolamin)

가지과 식물인 사리풀의 종자나 잎 또는 독말풀·흰독말풀의 종자 등에서 추출한 알칼로이드. 부교감 신경차단제로 "진경제", 즉 경련을 가라앉히는 약물로 사용.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투여할 때나 마취를 하게될 때 미리 투약함. 대표적인 것으로 아편알칼로이드 스코폴라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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