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영국이 지금도 공개를 거부하는 초특급 스파이
2차 대전이 역사책에 오르면서 그 이면에 숨겨졌던 비사들 대부분이 일반에 공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비교적 근래에까지 비공개였던 파일중 유명한 것은 에니그마(Enigma) 관련 파일을 들 수 있습니다. 대전 직후 동서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영국이 가진 "암호해독 능력"의 실체를 보여줄 수 있다는 이유로 해당 파일은 1970년대 초가 되어서야 기밀이 해제되었고 대서양 전투의 숨겨진 실체에 접할 수가 있었지요.
대전 이후 냉전시대에 관련된 각종 비밀 파일들도 속속 기밀해제가 되면서 역사가의 손에 오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60년의 세월이 흐른 21세기, 현재에 와서도 007로 유명한 영국의 MI6가 아직도 '국가안보'를 이유로 공개를 극력 거부하고 있는 비밀 파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인공은 독일에서 가장 유명했던 학술저널들의 운영을 맡아 독일 과학계의 흐름에 제일 정통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기사에 언급되었던 것처럼 로켓, 제트기, 레이다, 원폭개발, 그리고 유보트와 음향어뢰 등 당시 시대의 첨단을 걸었던 독일의 무기개발 계획 전반에 대해서 최고급 정보를 제공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흘 전 영국의 유력지 "더 타임스"지에 올라왔던 기사를 번역 소개합니다. 미진한 부분은 기사 본문 중간과 밑에 달린 역주에 보충해놓았습니다.
나찌에 대항했던 탁월한 영국 스파이의 파일 공개를 놓고
스파이의 유족들이 MI6와 법정 분쟁을 벌이다.
벤 매킨타이어(Ben MacIntyre)
The Times December 16, 2006
셰리 부스 여사, 나찌의 원폭개발 계획을 제공한
비밀 공작원에 대해서 정보 공개 요구 소송을 내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나찌의 원폭 개발계획에 대해 사활을 걸만한 정보를 영국측 제공했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공작원 그리핀(The Griffin)"에 관련된 최고 기밀 파일을 놓고 셰리 부스(Cherie Booth), QC(역주: Queen's Counsel, 법정변호사) 여사와 MI6 사이에서 치열한 법리 공방전이 벌어졌다.
국가안보를 이유로 관련 파일의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비밀 공작원 파울 로스바우트의 유족을 대변하고 있는 블레어 총리의 부인은 "상당한 개인 신상의 위험을 무릅써가며 연합국의 승리에 의심할 여지 없이 지대한 공헌을 했던 그를 국민들이 제대로 평가하고 올바로 인식할 수 있게끔" 흔히 비밀 정보국(SIS: Secret Intelligence Service)로 알려져 있는 MI6측에 대해 그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공개할 것을 요구하는 거부처분 취소 소장을 제출했다.
수사권 재판소(Investigatory Powers Tribunal)는 정보국의 행위를 심의한 끝에 거부처분 적법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유족측에서는 이 독일 공작원에 대한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단연코 캠페인을 계속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로스바우트는 대전중 가장 중요한 비밀 첩보원중 한 명이었다. 나찌 정권을 완강히 거부했던 과학자로서 그는 제트 항공기, 레이다, 활공폭탄 그리고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나찌의 노력에 대해서 여러 귀중한 정보들을 영국에 제공했다. 종전 무렵, 로스바우트는 영국군 군복이 입혀진채로 비밀리에 독일 국외로 빼돌려졌으며 이후 런던에 정착했다. 그는 1963년에 타계했다.
여러 해동안 MI6는 '국가안보'에 관련된 정보의 공개를 금하는 포괄적 금지법안에 해당된다는 이유로 "로스바우트 파일"을 공개하라는 일체의 모든 요구들을 거부해왔다.
부스 여사는 자신이 작성한 의견서에서 해당 법규가 로스바우트 사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로스바우트씨의 신분이 기밀로 남아 있어야할 논거가 없습니다. 로스바우트씨에 대한 파일 공개가 영국의 군사, 국제관계, 국가안보 혹은 경제적 이익에 확인 가능한 해를 입힐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아무런 논리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故 로스바우트의 조카인 빈센트 프랭크 슈타이너 박사는 MI6측이 파일의 공개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공작원 그리핀을 대우하는데 있어 그들이 저질렀던 몇몇 실수으로 인한 일종의 자기보호(self-protection) 행위"일것으로 믿고 있다. 그는 로스바우트가 전쟁에 기여한 공로는 아주 중요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에 관련된 모든 이야기들이 공개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고인은 아마도 일개 개인으로서는 히틀러의 나찌 독일을 패배시키는데 어느 누구보다도 큰 공헌을 한 분일 것입니다." 프랭크 슈타이너 박사가 말했다.
테이트 메달은 학계에서 국제적인 리더쉽을 발휘한 인물에게 수여되는 공로메달이다.
물리학의 황금기에 국제적인 학술저널들의 운영을 맡아 학계의 교류에 크게 이바지한
공을 인정받아 그가 첫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리버럴한 지식인이었던 그는 유태인 처녀와 결혼했으며 이어 히틀러가 권좌에 오르는 것을 공포감을 느끼며 지켜봤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의 경력은 순탄하게 풀려나갔다. 그는 주요 과학 간행물인 "금속학 저널(Metallwirtschaft)"의 편집장이 되었으며 이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의 학술 출판사인 스프링거 펠락(Springer Verlag)사의 과학담당 고문으로 일하게 되었다.
세련되고, 매력적이면서 대단히 명석했던 로스바우트는 독일내 최정상급 과학자 상당수를 알게 되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독일 과학계의 일익을 담당하는 인물이었으며 사적으로는 나찌 정권에 대항하는 음모에 가담하고 있었다.
1938년 로스바우트는 당시 MI6의 베를린 지국장을 맡고 있던 프랭크 폴리(Frank Foley)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유태계 부인인 힐데(Hilde)와 딸 안젤라를 은밀히 국외로 빼돌려 런던의 안전한 곳으로 내보냈다. 영국 대사관의 여권 담당직원으로 위장하고 있던 폴리는 수 천명의 유태인들이 독일을 탈출할 수 있게끔 도왔다. 그는 또한 로스바우트를 암호명 "그리핀(Der Greif)"이라는 이름의 공작원으로 정식 포섭했다.
사자의 몸통과 뒷발,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를 가졌으며 황금과 보석 근처에 둥지를 틀고 이를 탐하던 인간들로부터 재화를 지키는 감시자의 역할을 한다.야수의 용맹성과 명석함을 지녔으며 정의와 보호를 상징, 고대로부터 숱한 문양과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어쩌면 2차 대전사상 가장 걸출한 스파이일지도 모를 로스바우트에게 "그리핀"은 더할나위없이 잘 어울리는 암호명이였다.
암호명은 오싹할 정도로 아이러니했다. 그리핀은 히틀러가 총애하던 알사스 품종의 개 이름들중 하나이기도 했다. 로스바우트는 영국에 남아 있으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그는 나찌 정권에 대한 자신의 비밀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다시금 독일로 돌아가겠노라고 잘라 말했다.
로스바우트가 영국 공작원으로 수행한 첫번째 일이자 가장 의미심장했던 일은 그가 핵화학(Nuclear Chemistry)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화학자 오토 한(Otto Hahn)에게서 원자를 어떻게 분열시켰는지를 기술한 논문을 받았을 때인 1939년 1월에 벌어졌다. 핵분열이 가진 거대하고 파괴적인 잠재력을 직감한 로스바우트는 이미 조판 작업에 들어갔던 유명한 물리학 잡지 "과학(Naturwissenschaften)"의 기사 하나를 빼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오토 한의 논문을 집어넣었다. 이리하여 이 사실은 전세계 물리학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게 되었으며 원자폭탄 제조를 위한 범세계적인 경쟁을 촉발시키게 되었다.
상당수의 핵 물리학자들은 로스바우트가 재빠르게 핵분열 사실을 대내외에 공표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사안의 중대성을 깨닫게된 게슈타포가 신속히 이 사실을 차단, 은폐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핵경쟁에서 나찌가 확고한 위치를 선점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보고있다.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서, 리제 마이트너와 오토 한
여자로서 베를린 대학의 첫 정교수가 된 마이트너가 화학자 오토 한과 함께 참여한 공동 연구팀은 학제간 연구의 모범으로 꼽히며 핵분열을 발견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부득이 고국을 탈출해야 했던 그녀는 핵분열과 우라늄 연쇄반응의 이론적 규명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944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오토 한과는 달리 마이트너는 수상자 대열에서 탈락하고 만다. 이는 노벨상의 대표적인 여성차별 사례로 꼽힌다. 그녀를 기리기 위해 1982년 새로이 발견된 109번째 원소는 "마이트네리움(Meitnerium)으로 명명되었다.
로스바우트는 가능한 많은 과학 관련 첩보들을 수집하는 것과 동시에 다른 유태인 가족들이 나찌의 박해를 피해 국외로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 이중 가장 저명한 인물은 오토 한과 30년간을 공동으로 연구하면서 세계 핵물리학계를 선도해왔던 유태계 여류 물리학자인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였다.
대전기간 동안 로스바우트는 한 달에 한 번꼴로 끊임없이 비밀 메시지를 MI6에 전달했다. 이 메시지들은 프랑스의 지하 저항조직이나 노르웨이의 비밀 정보수집 조직인 XU를 통해 영국으로 밀송되었다. 때때로 베를린과 노르웨이 수도인 오슬로를 오가는 항공편을 이용할 때 그는 메시지를 암호화해서 책에 넣거나 마이크로필름으로 찍어 숨겨 가지고 다녔다.
로스바우트가 전달한 정보들의 정확한 세부 사항들은 여전히 MI6의 문서고에 밀봉된채로 남아있지만, 발틱 연안의 페네뮌데(Peenemunde)에서 제작중인 V2 로켓에 대한 상세한 정보들은 그가 제공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그는 원폭개발을 위한 독일측 프로젝트가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영국측에 제공했다.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는 - MI6가 그리핀 파일을 공개하려하지 않는 것을 설명하는 이유가 될지도 모르는 - 이유로 인해 이들 독일의 원폭개발 관련 정보는 미국측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1943년 5월 26일 페네뮌데의 군 수뇌부 시찰장면
좌측 인물이 로켓추진개발 담당 엔지니어인 발터 티엘(Walter Thiel) 박사.
우측이 기술 책임자인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박사. 가운데는 되니츠 제독.
좌측 두번째 뒤에 있는 인물이 유명한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이다.
페네뮌데 로켓센터에 대공습을 감행했다. 작전명 히드라(Operation Hydra).
저널리스트이자 필자였던 로스바우트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나찌 독일 내외를 돌아다닐 수 있었고 그가 던지는 호기심 많은 질문들은 좀처럼 의심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그의 보고서가 너무나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 MI6 요원들은 그가 역정보를 제공하는 나찌의 "이중간첩"이 아닌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로스바우트는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한 "7월 음모"가 실패로 돌아간 다음 날 베를린에서 탈출했다. 이는 아마도 그가 암살음모 가담자들과 연관성을 갖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런던에 도착한 로스바우트는 과학자로 계속 일을 하였으며 이어 종전 후 베를린에서 영국 외무성을 위해 공보관으로 활약했던 육군 대위 로버트 맥스웰(Robert Maxwell)과 함께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맥스웰은 출판업자로 새롭게 자기 사업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맥스웰의 회사를 위해 '페르가몬 출판사(Pergamon Press)'라는 이름을 제안한 사람이 바로 로스바우트였다. 하지만 이내 곧 두 사람은 격렬한 언쟁을 벌인 끝에 파트너 관계에 영영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로스바우트는 전시의 첩보 공작에 가담한 사실을 부인에게조차 숨겼다. 자신이 공개적으로 인정받기를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상당한 양의 개인서류를 파기해버렸다. SIS의 공식 역사에서는 그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단지 "독일 과학 저널지의 필자로 1942년 봄부터 SIS와 접촉을 유지했던 신뢰할만한 정보원"으로만 거론되고 있을 뿐이다. 공식적으로 비밀 공작원 그리핀은 결코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이다.
CIA 또한 로스바우트에 관련된 기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1955년에 작성된 것으로 기록된 미 법무성에서 흘러나온 메모에서는 "연합국의 대의를 위한 그의 공작활동은 성공적이었으며 대단히 큰 중요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도 이는 공개되어선 안 된다"라고 그의 존재를 못내 시인하고 있다.
아놀드 크라미쉬(Arnold Kramish)가 집필한 로스바우트의 전기는 1986년에 출간되었다. 하지만 MI6의 문서고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기는 그에 대한 여러 사실들을 설명한 만큼이나 여전히 많은 의문점들을 제기하고 있다. 로스바우트가 영국측에 제공한 정보는 정확히 무엇일까? 유태인 친구들, 유태인 부인과 함께 했으면서도 어떻게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게슈타포의 주목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왜 영국측은 나무랄데 없는 소스로부터 독일의 원폭개발 프로그램이 실패로 끝난 첩보를 입수하고서도 이를 미국측에 전달하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6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도 MI6가 '비밀 첩보원 그리핀'에 대한 이야기를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
부스 여사가 법원에 제출한 자신의 소장에서 지적했듯이 MI6 베를린 지국장이었던 프랭크 폴리에 대한 저서("폴리: 1만명의 유태인을 구한 스파이" 마이클 스미스 著)는 이미 출간되었으며 현재 그의 일생을 다룬 영화가 기획중에 있다. 하지만 폴리의 가장 중요한 첩보원인 로스바우트에 대한 진실은 여전히 공식기밀이라는 이름속에 감추어져 있다. "프랭크 폴리 소령에 대한 파일을 공개하기로 한 결정은 그의 공작원인 로스바우트씨에 대한 파일공개가 현실적으로 국가 이익을 훼손시킬 것이라는 주장의 타당성을 잃게 만들고 있습니다."라고 부스 여사는 기술했다.
로스바우트는 런던의 聖 매리 병원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바다 위에 뿌려졌다. 그는 500파운드와 금시계, 미국 물리학 학회(AIP: American Institute of Physics)에서 수여받은 공로메달 그리고 지금도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를 남기고 떠났다.
그리핀의 묘책
"그리핀" 파울 로스바우트는 MI6의 담당 통제관(controller)인 프랭크 폴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감추기 위해 정교한 방법들을 고안해냈다.
대형 출판사 스프링거 펠락의 선임 간부였던 로스바우트는 암호화된 메시지를 출간된 책의 텍스트 형태로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자만심 강한 책의 필자들이 으례 책의 초판본에만 꼼꼼이 신경쓸뿐 그 후의 증쇄본에는 덜 신경쓴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기존의 단어들은 재배열됬으며 심지어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고도 새로운 단어를 집어넣을 수 있었다. 이 책자들은 중립국에 파견되어 있던 MI6 요원들이 입수해서 해독을 위해 런던의 MI6 본부로 보내졌다.
로스바우트는 숫자로 된 암호체계도 고안해냈다. 공작원과 MI6 암호 해독가 사이에 특정 책자를 사용하기로 합의를 봤다. 일반적으로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영국과 독일에서 구할 수 있었던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을 선택했다. 메시지 각각의 단어들은 책의 페이지, 줄, 특정 줄에서 해당 단어의 위치를 지칭하는 3가지 숫자들을 합성한 수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메시지는 참조된 책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겐 이해하기 힘든 길다란 수열들로 변환되었다.
로스바우트의 영국측 공작 지휘관들 또한 BBC를 통해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방법을 만들어냈다. 저녁 9시, BBC가 "집은 언덕 위에 있습니다(Da Haus steht am Hugel)"라는 말로 방송을 시작한다면 이것은 그리핀이 특별 메시지에 주의하라는 의미였다. 그리핀의 통제관이 그 이상의 정보를 전달하기를 원한다면 예컨대 문장단락 2, 6, 9 또는 과거의 메시지를 언급하기 위해 아나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집에는 2개의 문과 6개의 창틀, 그리고 9개의 굴뚝이 있습니다."
출처: "그리핀, 2차 대전중 가장 탁월했던 첩보공작의 숨겨진 비화" 아놀드 크라미쉬著
(The Griffin: The Greatest Untold Espionage Story of World War II, by Arnold Kramish)
-역주-
1. 세리 부스
:토니 블레어 총리의 부인인 셰리 블레어(Cherie Blair). 저명한 변호사인 그녀는 자신의 일과 관련해서는 처녀 때 성을 사용하고 있다.
2. 수사권 재판소(Investigatory Powers Tribunal)
: 9.11 테러 이후 영국은 2000년 대테러방지 차원에서 정보/수사당국의 광범위한 검열과 수사를 허가하는 "수사권한 규제법(RIPA: Regulation of Investigatory Powers Act)"을 통과시켰다. 수사권 재판소(IPT)는 RIPA 법안에 따른 정보기관의 공권력 행사 또는 불행사에 대해 권리나 이익을 침해받은 국민이 제기한 이의나 불만을 접수하여 이를 심의하는 기능을 맡으며 기존의 각종 정보기관 관련 심의 재판소들을 통합해서 세워진 재판소.
3. 스프링거 출판사
:율리우스 스프링거가 1842년 설립한 소규모 출판사로 시작, 그의 아들들이 공학, 의학, 물리학 같은 학술 출판분야에 진출하면서 유럽권에서 가장 유명한 학술 전문 출판사로 부상했다. 한때 아인슈타인이 저널의 편집진에 참여했으며 그의 "상대성 이론" 논문은 스프링거에서 출판되었다. 현재 70개의 산하 출판사와 1450종의 각종 학술저널들을 펴내고 있다. 엘제비어(Elsevier) 출판사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큰 대형 학술 출판사.
4. 프랭크 폴리 소령 (Major Frank Foley)
: 전쟁 전 MI6의 베를린 지국장, 대전 중에는 "그리핀"의 통제관(controller)으로 활동했다. 한때 신부를 꿈꿨던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폴리는 히틀러의 나찌를 惡이 지상에 현신한 것으로 간주했으며 나찌의 대대적인 박해가 있기도 전에 유태인들의 운명을 예감했다. 외교관 면책특권이 없었으면서도 언제든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될 수 있는 신상의 위험을 무릅써가면서 쫓기는 유태인들을 자신의 거처에 피신시키고 여권담당이라는 위장신분을 활용, 최대 1만명으로 추산되는 유태인들의 국외탈출을 도왔다.
국가적인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폴리와는 달리
로스바우트에 관한 전모는 여전히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있다.
최근 이스라엘은 그를 "의인"으로 선언했으며 영국 정부도 뒤늦게 공로를 공식 인정하면서 그를 "진정한 영국의 영웅"으로 칭송했다. 그가 근무했던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관에 기념명패가 달렸으며 고향 마을에는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5. 로스바우트, 핵분열의 산파(Midwife to Fission)
로스바우트는 어느 누구 보다도 먼저 핵분열의 중대성을 깨달았던 인물이었으며 그의 역할은 단순히 오토 한의 논문을 학술 저널에 신속하게 공표한 것 그 이상이었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영국의 원로 과학자 러더포드(Rutherford)卿은 1933년 핵 에너지의 실용적인 가치를 언급하는 자리에서 이를 순전히 "허튼 소리(moonshine)"에 불과하다고 하며 일소에 붙인 바 있었다. 6년 후 핵분열을 발견했던 당시만 하더라도 상황은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어서 MI6는 과학 전문가가 없었으며 핵물리학같은 난해한 분야에 최소한의 관심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대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독일은 핵물리학 연구에서 가장 앞서 있었던 나라중 하나였으며 잘 조직화된 연구 프로그램과 최정상급의 자질을 갖춘 연구진과 엔지니어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수 이는 공업력등 원폭을 만들기 위해서 이상적인 기반을 갖고 있었다.
나찌 독일이 신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로스바우트는 결국 나찌가 핵을 군사적으로 전용할 것이라는 스스로의 예측에 경악했다. 1939년 초 로스바우트는 영국과 독일을 오가는 일종의 밀사 역할을 자임하며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서 쏟아져 나온 각종 실험 데이타와 미출판 논문 그리고 자신이 만든 요약본을 갖고 영국을 수 차례 방문, 세계최초로 입자 자속기를 만든 케임브리지의 존 콕크로프트(John Douglas Cockcroft) 교수같은 지도적인 과학자들을 만나서 독일에서 진행중인 연구들의 현황을 설명하고 핵분열의 실용적인 가치에 대해 적극적으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로스바우트의 예상은 이내 적중해서 화학자인 파울 하르텍(Paul Harteck)과 열성적인 나찌당원이자 가이거 계수기의 개발자인 한스 가이거(Hans Geiger)같은 일단의 독일 과학자들은 국방군 병기국(Heerswaffenamt)에 편지를 보내 '핵무기는 기존의 재래식무기를 뛰어넘는 실현가능한 무기이며 이를 먼저 개발하는 국가는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압도적인 우위를 선점할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 소위 "독일판 맨하탄 계획"의 신속한 집행을 촉구했다.
핵개발의 군사적 가치와 중요성을 깨닫게된 나찌 당국은 1939년 4월 주요 연구 관계자들을 소집, 비밀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는 핵물리학 연구에 대한 보안 유지, 독일내 우라늄 원석 확보와 해외 수출금지 그리고 무기개발 등의 의제들이 논의되었다. 로스바우트는 나찌가 주최한 비밀 회의에서 논의된 사항들을 다음 날 회의에 참석했던 학자들로부터 모두 브리핑 받았으며 이는 고스란히 영국측에 전달되었다. 영국은 로스바우트를 통해 착상단계에서부터 종전 때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독일 핵개발의 전모를 낱낱이 파악할 수 있었다. 시작 단계에서부터 뒤에서나마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핵분열을 전세계에 알리고자 노력했던 그를 가리켜 "핵분열의 숨겨진 산파(Midwife)"라고 일컫기까지도 한다.
한편 나찌의 비밀 회의가 있은지 4개월 후인 1939년 8월 미국에 망명한 물리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을 설득, 루스벨트에게 핵개발의 중요성을 알리는 편지를 쓰게했다. 루스벨트는 2차 대전이 발발한 후 한 달이 지난 10월에서야 이 편지를 꺼내 읽어보았다. 그러고서도 2년이 흘러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있고 나서야 미국의 핵개발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가 본격적으로 가동된다. 그때까지도 영국은 끊임없이 미국측에 핵개발의 긴급함을 설득, 촉구했었다.
출처: The Griffin (Houghton Muffin Co., 1986)
6. 로버트 맥스웰(Robert Maxwell)
: 영국의 언론재벌. 유태계 이민자 출신으로 대전중 영국군에 사병으로 입대했다. 명석한 두뇌와 수개국어를 할줄 아는 재능 덕에 훈장을 수여받으면서 대위로 재빠르게 진급했으며 종전 이후에는 베를린에서 공보와 검열업무를 담당했다. 로스바우트와 손을 잡고 유서깊은 스프링거社의 미.영국측 공급자를 맡게되면서 출판계에 투신, 이후 데일리 미러, 맥밀리언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면서 영국을 대표하는 언론출판 재벌로 부상했다. 1991년 자살로 의심되는 의문사로 사망했다. 로스바우트와 함께 시작한 페르가몬 출판사는 이후 굴지의 대형 출판사로 성장했으며 맥스웰의 사후인 1992년, 엘제비어 출판사에 의해 인수되었다.